[기고]한국문학 세계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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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국문학 세계화의 길
  • 김정숙 기자
  • 승인 2017.03.0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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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김정숙 기자]“밀턴과 포프가 동방의 의상을 걸친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만년의 괴테는 자신의 저작 ‘서동(西東)시집’에서 유럽인들의 어설픈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문학관을 이런 비유를 들어 경계했다.

‘문학의 중심부’를 자처하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볼 때 동방의 문학은 한갓 저급한  ‘변두리의 문학’으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럽이 낳은 ‘보편적 천재’ 괴테의 눈은 달랐다. 낙후한 하급문학으로 간주되기 일쑤인 변방의 문학 또한 중심부 문학 못지않은 세련된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유럽과 동양의 세계를 아우른다는 ‘서동시집’의 의미대로 괴테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고 세계문학의 모델이 될 만한 작품을 남겼다.   

괴테는 마호메트가 기원 622년 고향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이주해 이슬람의 기원을 세운 사건  ‘헤지라’를 모티프로 시를 썼다. “북쪽, 서쪽, 남쪽이 산산조각이 나고 / 왕좌들은 부서져 왕국마다 떨고 있으니 / 달아나라 그대여, 순수한 동방에서 / 옛 족장들의 숨결을 맛보아라 / 사랑과 술과 노래 더불어 / 키저의 샘물이 그대를 젊게 하리니” 시인의 눈에 비친 동방 세계는 신과 족장의 권위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시인의 노래를 사랑할 줄 아는 순수의 땅 그 자체였다. 게르만적이고 현학적인 자만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을 얻기 위해 괴테는 이처럼 이슬람 세계와 중국은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괴테가 주창한 세계문학의 이념, 곧 문학이란 각 민족이 지닌 개별성을 존중하는 한편 인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데 봉사해야 한다는 정신과 통한다. 

여기서 새삼 괴테의 세계문학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그가 기획한 하나의 ‘이념’ 혹은 ‘운동’으로서의 세계문학 정신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의 중심부와 주변부, 보편과 특수 간의 조화로운 소통과 만남을 꿈꾼 괴테의 세계문학 구상은 물론 이상론에 가깝다. 괴테의 세계문학 이상이 오늘의 세계문학 시장에서 얼마나 현실적 실효성을 담보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괴테의 개방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세계문학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는 온갖 형태의 지역주의와 패권주의, 정치적 반목과 적대가 기승을 부린다. 문학의 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세계문학 공간은 이미 괴테가 구상한 소통하고 교류하는 평화적인 대화의 공간이 아니다. 세계문학 장에서의 권력관계는 강고하다. 프랑스의 문학이론가 파스칼 카자노바가 말한 이른바 ‘세계문학공화국’은 국민문학들 사이에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상징투쟁의 장이다. 세계문학의 지형은 동등한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문화적 자본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몇몇 구미 국가들을 핵심으로 한 중심부 대문학(major literature)과 비유럽권의 국민문학을 지칭하는 주변부 소문학(minor literature) 간의 위계관계는 뚜렷하다. 권력의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계문학공화국에서 비유럽국가들의 처지는 초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카자노바는 세계문학의 반열에 들기 위해 다투는 국민문학 당사자들이 인정해야 할 절대적 기준으로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한국의 ‘문학적 시간’의 거리는 어디쯤일까. 세계문학공화국에서 한국의 위치는 안타깝게도 머나먼 변방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문학을 세계문학의 마당에 선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러니다. 무엇을 써서 어떻게 내놓아야 할까. 한국 작가들이 어떻게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몽매에도 그리는 노벨문학상도 받고, 세계문학 정전(正典)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빛의 제국’의 작가 김영하는 세계무대에서 한국문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민의 일단으로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번역에 견딜 수 있는 작품을 써야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유럽의 변방 아일랜드 출신인 제임스 조이스는 철저하게 더블린 삶의 현실을 다뤘다. 그러나 조이스는 아일랜드 문화의 편협함에 반발했고,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이나 그 밖의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 혹은 지역문화 옹호 운동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이스에게 ‘지방색’과 ‘국제적 작가’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더블린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조이스의 말이다. 요컨대 특수성에는 보편성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이스의 작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은 통일된 모습을 보인다. ‘세계문학의 대가’ 조이스의 이런 양가적인 문학 내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문학이라는 범주는 국민문학의 성취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만큼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을 대립개념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조이스의 예에서 보듯 특수성을 최대한 깊이 파고들 때 보편의 지평은 열린다. 관건은 국민문학이 각자의 민족 현실과 치열하게 고투해나가는 가운데 얼마나 문학적 성취를 올리고 세계문학적 보편성을 획득하느냐 하는 것이다.

세계문학의 서구 취향을 의식해 창작 단계에서부터 ‘세계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인가.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형제’는 종종 해외 독자들을 겨냥해 서구의 구미에 맞게 보여주기식으로 문화대혁명을 묘사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세계문학의 주변부 내지 반(半)주변부 작가로서 ‘세계’와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화초나 나무를 분재하듯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결국 약이 아니라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번역의 문제다.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지금도 여전한 논쟁거리다. 혹자는 문학번역의 경우 축자역에 가까운 충실성이 번역의 성패를 가늠한다고 주장한다. 원문의 글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원어 고유의 언어구사에서 발생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살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의역론자들은 언어는 문화적 산물로 문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문화번역’이 필요하다거나 독자들에게 읽히는 번역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의역에 따른 의미의 왜곡은 감수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번역된 이청준의 ‘눈길’이나 이호철의 ‘탈향’ 같은 소설의 경우 영어로만 읽으면 수월하게 읽히지만 심각한 ‘원작 훼손’의 과정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본은 대체적으로 원문의 큰 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돋보이게 할 것은 돋보이게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역점을 두지 않는 식으로 번역의 성가를 높였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번역자인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이 ‘개작’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행간의 의미를 살피는 수준을 넘는 ‘의역 이상의 번역’을 한 것인가. ‘채식주의자’의 번역과 관련, 아직은 번역자가 현지인의 취향을 살린 개작 수준의 번역이 현지에서 받아들이는데 용이하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진보적 번역이론가인 로렌스 베누티는 미국 출판계의 번역 관행이 외국문학의 ‘외국어적 성격’을 지우고 ‘내국화’하는 기제로서 작동한다고 비판한다. 우리로서도 크게 참고할 만하다. 문체를 살릴 것인가, 의미를 살릴 것인가. 문학번역과 관련해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번역과 원작 간의 숙명적인 간극을 세계문학의 맥락에서 극복하기 위한 심도 있는 방법론적 논의가 필요하다.  

국내 작가의 첫 맨부커상 수상에 대해 일각에서는 ‘제2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셈이라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맨부커상을 넘어 더 큰 문학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노벨문학상은 세계문학의 정전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유력한 관문이다. 일본에는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신의 노벨상 수상 절반의 공을 돌린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열정적인 일본문학 연구자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를 지낸 도널드 킨은 일본에 심취해 100종이 넘는 일본문학 작품을 영어로 옮겼다.

한국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전문 번역가 양성이 시급하다. 작가와 번역자, 출판사가 각자 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골든 트라이앵글’을 정착시켜야 한다. 한국문학이 국민문학인 동시에 진정한 세계문학의 대열에 들 수 있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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