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김정일 사망후 외부 세계와 단절 계속 대량살상무기 개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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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김정일 사망후 외부 세계와 단절 계속 대량살상무기 개발 가능성
  • 코리아포스트
  • 승인 2010.07.0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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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김정일 사망후 외부 세계와 단절 계속 대량살상무기 개발 가능성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머리말
2009년 1월 8일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이 김정일 사후에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을지, 아니면 북한 지도부 내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여 다른 엘리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거나 심각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할지 등의 문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미와 주변국들의 매우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김정일은 ‘수령의 후계자’로서 군대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에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김정은도 만약 군대를 확고히 장악한다면 김정일 사후 권력승계에 성공할 것으로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후계자 김정은의 군 장악과정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김정일이 1974년에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된 후 어떻게 군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고에서 먼저 김정일의 군대 장악 과정을 간략히 고찰하고, 이어서 김정은의 군사 경력과 자질을 살펴본 후 그의 북한군 장악이 어느 수준에까지 도달했는지 분석하기로 하겠다.
 
김정일의 군권 장악과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역할
북한에서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장악이 권력승계, 특히 군권(軍權) 승계와 관련하여 갖는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3년 이전에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권한이 어떻게 강화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군대에 대한 조직지도부의 통제와 관련하여 1969년 1월에 개최된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는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이 회의에서 오진우 군 총정치국장은 김창봉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의 과거 명칭) 등에 대해 군대 내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방해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김창봉 등 군 수뇌부 일부가 숙청되었고, 연대 이상에 정치위원이 파견되었으며, 중앙당 조직지도부가 군 정치간부를 직접 관장하게 되었다.
한편 김일성은 1969년 11월 7일 당중앙위원회가 북한군 집단군과 군단 정치부에 조직부장들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군 지휘관들과 정치일군 모두 당원들이기 때문에, 중앙당 조직지도부는 파견한 조직부장들을 통해 집단군과 군단 당원들의 당조직생활을 지도하면서 군 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의 모든 활동을 다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일은 1973년 9월에 중앙당 조직지도부장 직을 겸임하는 조직비서 직을 맡게 되면서 이처럼 권한이 강화된 조직지도부를 통해 군 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에 대한 인사권과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김정일은 1974년 2월 13일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수령의 후계자’로 결정된 후, 1975년경부터는 군대가 김일성에게 보고문건․비준문건을 직접 올리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자신을 통하도록 체계를 바꿨다. 이 시기부터 북한군 병영과 사무실에는 일제히 김정일의 초상화가 내걸렸다. ‘수령(김일성)의 군대’가 ‘수령(김일성)과 수령의 후계자(김정일)의 군대’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은 1970년대 중후반에 김정일 ‘조직비서’가 군대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1977년 8월 20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회의를 열어 중앙당 조직지도부가 군 총정치국 간부들의 당조직 생활을 철저히 장악 통제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1979년 2월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를 소집해서 중앙으로부터 하부 말단 단위에 이르기까지 당사업과 군사사업을 비롯한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집행해나가는 ‘강한 조직규율’을 세우도록 했다.
1980년 10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 당중앙군사위원에 선출됨으로써 대외적으로도 제2인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김일성은 1982년 6월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를 소집하여 전군에 김정일의 명령지휘체계를 철저히 세우는 조치를 취했다.
1990년대에 들어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군통수권과 국방사업에 대한 전권까지 이양하게 된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24일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됨으로써 군통수권을 물려받았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군의 최고직책인 최고사령관 추대 권한을 가진 것은 바로 조선인민군이 ‘당의 군대’이기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1993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국방사업에 대한 지도 권한도 물려받게 되었다. 이처럼 김정일은 모든 군권을 미리 물려받았기 때문에 1994년 김일성의 사망 이후 북한의 명실상부한 제1인자가 될 수 있었다.
 
김정은의 군사 경력과 자질
군대를 숭상(崇尙)하는 김일성의 영향 하에 김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김정은도 어렸을 때 군복을 자주 입었다. 3남 김정은은 성격이 유순한 차남 김정철과는 다르게 승부욕이 강했고, 정치적 야심과 리더십을 보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두 형들이 스위스에서 유학한 것처럼 김정은도 스위스 베른에서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약 4년 반 동안 수학했다. 그리고 귀국 후 2002년부터 2006년 12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북한 군대에서 2009년 5~6월경 작성되어 배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이하 「위대성 교양자료」로 약칭)는 “의미 깊은 2006년 12월 24일,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와 기장이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북한이 김정은의 졸업식 날과 ‘주체의 선군혁명위업 계승’ 의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이때가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위대성 교양자료」는 2006년 12월 24일 인민군 지휘성원 모두가 김정은이 북한에서 최초로 인공위성 자료와 GPS수신기 좌표를 이용해 만든 작전지도를 보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군사전략사상이 빛나게 구현된 기상천외하고 천별만화하는 만점 계획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건은 또한 김정일도 이 작전지도를 보고 “작전계획이 아주 창조적이고 착상이 기발하여 1~2번 감복한 것이 아니라고 의미 있게 말씀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북한의 일반 대학생이 인공위성 자료와 GPS 수신기 좌표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김정은이 이처럼 첨단정보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김정일의 아들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이 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가 김정일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한군 내부 자료는 또한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시절에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원 2년제를 전과목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김정일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서 대학이 김정일의 3남에게 그보다 낮은 성적을 줄 수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의 활동과 개인숭배 선전
김정일은 2009년 1월 8일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리제강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하달했다. 후계자 결정 사실은 동시에 과거 김정일의 군 장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을 통해 북한군 대좌(대령급) 수준까지도 전달되었다. 이처럼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결정되기 전인 2008년 12월에 북한 군부에서는 비공개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계자로서 김정은의 활동은 지명 직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김일성의 97회 생일(4월 15일) ‘축포야회(祝砲夜會)’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치밀하게 준비해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그 앞에서 시험발사를 선보였다. 김정일은 이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전해진다.
2009년 4월 14일 김정은은 ‘강성대국의 불보라’라는 이름으로 김정일도 참석한 가운데 중국•타이완 등에서 여는 춘제 불꽃축제를 본떠 성대하게 ‘축포야회’를 개최했다. 「위대성 교양자료」는 태양절(김일성 생일) 축포야회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장군님(김정일)은 의미 깊은 4월 명절을 맞이하여 추진하신 축포야회를 보시고 최대의 만족을 표하시고, 자신은 김정은 대장 동무가 당과 인민을 위해 헌신적인 것을 했다고 알았을 때마다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은 또한 5•1절(국제노동절)날에는 북한 전역에서 금속공업과 연관부문의 노동자 1만5000여 명을 평양에 불러들여 김정일과 함께 축포야회를 비롯해 다양한 경축공연을 관람토록 하는 성대한 행사를 기획•조직했다.
북한 노동당 지도부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군대와 국가안전보위부 내에서부터 김정은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그의 ‘위대성’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6월 초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김정은의 ‘혁명업적’에 대한 강연들이 진행됐으며, 김정은을 찬양하는 ‘발걸음’이라는 노래가 보급되어 행진할 때마다 합창곡으로 부르게 했다.
김정은은 2009년 5월경부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에서 본격적으로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정치국 통보과와 당위원회 조직의 보고를 통해 김정일이 주요 군 간부들에 대한 인사 단행시 참고할 내부 간부사업 문건(인사 평가서) 작성을 총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은 또한 김영춘 부장을 포함한 인민무력부 주요 간부들의 조직사상생활 등을 보고받은 후 그 내용을 김정일에게 직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김정은은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도 사전 조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 후계체계의 핵심 군부 조직과 엘리트
북한군 3대 상설조직인 군 총정치국,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는 군 총정치국의 우위가 유지되는 가운데 1998년경부터 형식적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 때 군 총참모부는 공격작전용 부대들을 주로 관장했고, 인민무력부는 방어용 부대들과 군에 대한 보급품․군수물자의 지원과 전시대비 비축물자의 확보 및 조달임무를 담당하는 후방총국을 관장했다. 그러나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진 이후 군대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면서 2009년 2월~4월경 충성도가 가장 높은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이 군 총참모부를 지도하도록 체계를 개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은 후방 방어와 보장 작전을 총괄하던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직함만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바뀌었다. 김정일은 이 같은 조치를 통해 김영춘이 군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군대를 통솔하여 후계자 김정은을 보좌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60대인 김정각 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과 리영호 군 총참모장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김영춘에게 군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에 대한 김정일의 견제와 김 인민무력부장의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현재 김정각 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과 리영호 군 총참모장이 김정은의 최측근 실세로 김정은에 대한 군대의 충성 유도와 김정은의 영군체계(領軍體系) 수립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김영춘은 군 원로로서 김정은의 군 장악을 후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일의 군 장악이 주로 군 총정치국을 통해 이루어짐에 따라 특히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은 군 간부들의 조직생활 통제와 인사를 통해 군대에 대한 김정은의 지도체계 수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군대 내에서 간부와 병사들에 대한 사상교양을 통해 김정은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데에는 한동근 군 총정치국 선전부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한동근 상장의 지휘 하에 군 총정치국 선전부는 김정은의 ‘위대성’ 선전과 찬양 강연회 및 집회 조직에 중앙당 선전선동부보다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정은의 군부 장악 전망과 대북정책 과제
북한군 총정치국 선전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되는 「위대성 교양자료」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김정은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 영지와 지략을 지닌 군사의 영재’, ‘현대군사과학과 기술에 정통한 천재’로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은의 군 지도체계를 의미하는 김정은의 ‘영군체계’ 수립을 강조하고 있으며, ‘경애하는 장군님과 꼭 빼닮은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에게 운명도 미래도 모두 위임’할 것을 군 장병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북한군이 이미 ‘김정일의 군대’에서 ‘김정일․김정은의 군대’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위대성 교양자료」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1974년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된 후 김정일의 군 장악을 위해 중요한 조치들을 내린 ‘당중앙군사위원회’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문건은 간부들이 김정은의 영도를 충직히 받들 것을 강조하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은 올해(2009년) 2월 11일과 작년(2008년) 3월 27일 당중앙군사위원회에서 일꾼들의 혁명화와 전투준비에 속도를 가하는데 대한 문제, 부대 지휘관리를 개선하고 군기를 확립하기 위한 사업, 중대를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나타난 결함을 시급히 대처하는데 대한 강령적인 과제를 제시하시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김정일이 김정은의 군 장악을 위해 당중앙군사위원회에서 모종의 조치를 내렸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2009년 5월부터 인민무력부 고위 간부들에 대한 인사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현재 최고위급 인사들을 제외한 군 장성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인사권과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군 지휘권은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하기 전에 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직을 김정일에게 미리 이양한 것처럼, 김정일도 사망 전에 김정은에게 군사 관련 핵심 직책들을 맡기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현재 만 27세인 김정은의 나이와 그의 일천한 지도 경험을 고려할 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군과 국방사업 지휘권을 넘기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김정일은 향후 수년 내에 김정은에게 당중앙군사위원 직과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부터 우선 맡길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정일의 건강상태가 급속히 악화되는 경우에는 김정은에게 군 최고사령관 직을 서둘러 이양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은이 비록 최고지도자가 되기에는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군부의 파워 엘리트들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고 대안 세력이 없어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현재로서는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가 권력을 승계하더라도 군대에 대한 장악력이 약한 상황에서 비핵화에 부정적인 군부의 입장을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김정일의 생존시에 6자회담을 통한 대북 설득과 압력이 필수적이다.
김정일은 장기간의 후계수업과 여러 차례의 숙청으로 군대를 철저하게 장악하게 되었지만, 김정은으로서는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군대의 지지가 필수적이므로 오랫동안 군부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정은은 대외적으로 강경한 군부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을 담대한 ‘군사의 영재’로 내세우기 위해 국제사회와의 군사적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킬 수도 있다.
과거 김일성 사망 이후 약 6년간 김정일이 국제사회와의 대화에 나서지 않고, 미사일 개발로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낸 것처럼, 김정은도 김정일 사후 오랫동안 북한을 외부세계와 차단한 채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매달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는 현재의 김정일 정권 그리고 미래의 김정은 정권을 어떻게 관리하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이끌어낼 것인지 중장기적인 구상을 가지고 대북정책을 전략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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