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프랑스 대통령들의 사랑, 프랑스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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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프랑스 대통령들의 사랑, 프랑스식 사랑
  • 피터 조 기자
  • 승인 2017.02.23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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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

 [코리아포스트 피터 조 기자]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다. 1994년 11월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가 커버스토리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 처녀와 레스토랑을 나서는 사진을 게재했다. 제목은 ‘특종:대통령의 숨겨진 딸’. 깜짝 놀랐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현직 대통령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파파라치를 시켜 대통령 뒤를 따라다니며 ‘불경스럽게도’ 현장을 잡아 대서특필하는 언론이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동양에서 온 기자를 한 번 더 놀라게 한 건 이를 바라보는 프랑스의 정서였다. 기사를 쓰려고 일간지들을 뒤졌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관련된 이런 명백한 사실이 뉴스 밸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 뒤, 프랑스 최고 권위지인 르몽드 1면에 드디어 관련기사가 나왔다. 사설이었다. 간단명료한 그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Et, alors?” 영어로 옮기면 “So what?”이다. 우리말로 하면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정도일 것이다. 대통령을 비난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사생활을 폭로한 파리마치를 준엄하게 꾸짖은 논조였다.

대통령의 숨겨진 여인은 안 팽조였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미테랑은 46세로 사회당의 대선 후보였다. 팽조는 19세의 여고생이었다. 고향친구의 딸로 무려 27세나 연하였다. 미테랑은 당시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아내 다니엘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미테랑이 65세에 대통령에 당선된 후 퍼스트 레이디가 된 다니엘은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았다. 엘리제궁의 바비인형이 되기 싫다며 파리 시내에 살면서 프랑스자유재단이란 인권단체를 운영했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팽조는 대통령의 정부(情婦)로 숨어 살았다. 미테랑은 재임 14년간 (1981~95년) 엘리제궁에서 자지 않고 거의 매일 파리 시내 그녀의 집에서 잔 것으로 알려졌다. 알 만한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팽조 모녀가 처음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건 파리마치 보도 2년 뒤인 1996년이다. 퇴임 1년 만에 전립선암으로 타계한 미테랑의 장례식에서다. 두 모녀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본처’인 다니엘 미테랑과 장례식장에 상복을 입고 나란히 섰다.

모녀의 스토리는 이어진다. 박물관 큐레이터로 평생을 일한 팽조는 미테랑과의 34년 관계에 대해 함구했다. 그러다 아내 다니엘도 세상을 뜬 지 5년 후인 2016년 비로소 미테랑이 자신에게 보낸 연애편지 1218통을 엮은 책 ‘안에게 쓴 편지’(국내 미출간)를 출간했다. 문필가이자 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한 시대의 거인 미테랑의 러브레터는 문학적이고 관능적이며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편지 중 몇 토막이다.

“이 작은 책이 당신과 함께 보낸 아름다웠던 여름을 간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될 것입니다.”(1962년 첫 편지, 소크라테스의 책 한 권을 동봉하며)

“당신을 만난 후 위대한 여정이 될 것임을 직감했으며 내가 어디를 가든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팽조,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숨어서 지내야 하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소. 어린 딸이 사랑이란 가혹한 볼모로 평생을 자신의 날개도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감스럽소.”

“당신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었소.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소.”(사망 몇 달 전 마지막 편지)

미테랑이 58세에 낳은 딸은 마자린 팽조(43)다.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로 성장한 그녀는 한국과 작품으로 인연이 있다. 2006년 서울 서래마을에서 발생한 영아살해 냉장고 유기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인형의 무덤’(2009년 국내 출간)을 발표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야 했던 자전적 에세이 ‘함구’(2005년 국내 출간)에서 그녀는 “세상은 나의 존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고 술회했다.

그녀 역시 독립적이었다.

“아침 식사 후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박물관으로 가면 아버지는 차로 엘리제궁으로 갔고 나는 학교로 갔다. 내 출생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소설가는 나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나를 정치적 상속자나 잔재로서가 아닌 내가 창조해 내는 것, 내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평가하길 바란다.”

니콜라 사르코지

현직 대통령이 이혼하고 열세 살 연하인 인기 연예인과 비밀리에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2007년 52세로 대통령에 취임한 니콜라 사르코지다. 그는 취임 다섯 달 만에 모델 출신 아내 세실리아와 이혼하고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수퍼모델 겸 가수 카를라 브루니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이미 혼외 관계였다. 18년을 함께 살았던 두 번째 아내 세실리아는 사르코지가 파리 근교의 한 도시 시장을 지낼 때 주례를 섰던 결혼식에서의 신부였고 첫 번째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사르코지와 브루니는 엘리제궁에서 딸을 낳았다. 사르코지는 23명의 프랑스 대통령 가운데 재임기간 중 이혼하고 자식을 낳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두 사람의 연애 편력은 화려하다. 퍼스트 레이디가 된 브루니는 오랫동안 가수 믹 재거의 연인이었고 에릭 클랩튼, 케빈 코스트너와 사귀고 현재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와 염문을 뿌린 스타였다. 그녀는 또 저명한 철학자인 장 폴 앙토방과 사귀다 그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두 아들을 낳기도 했다. 외무장관으로 입각한 로랑 파비우스와 잠시 연인 관계였음도 밝혀졌다.

브루니와 결혼한 후 사르코지는 자신이 법무장관으로 발탁한 라시다 다티라는 42세의 아프리카 빈민 가정 출신 변호사와 염문설에 휩싸였다. 미혼의 다티 장관은 재임 중에 딸을 낳았는데 한때 사르코지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미혼의 법무장관이 임신을 하고 배가 부른 몸으로 집무를 하고 당당하게 아이를 안고 나타났어도 프랑스에선 별 뉴스가 되지 않았다. 사르코지 부부는 재임 중 서로 맞바람을 피웠다는 영국 일간지의 보도도 있었다. 브루니의 상대는 프랑스 가수이고, 사르코지의 상대는 당시 내각의 장관이라며 실명도 보도됐지만 두 사람은 이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았다.

프랑수아 올랑드

우파연합의 사르코지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할 때 경쟁자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였다. 프랑스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가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루아얄 후보는 1, 2차 투표(프랑스 대선은 과반 득표자가 없는 경우, 1차 투표 2주 후에 상위 후보 두 명을 상대로 결선 투표를 한다)에서 사르코지에게 패한다. 빼어난 미모의 루아얄은 최고의 엘리트를 키우는 그랑제콜인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에 우아하고 패션 감각도 뛰어난 가장 프랑스적인 여인으로 통한다, 미국 잡지에 의해 가장 섹시한 여인으로 뽑힌 적도 있다.

5년 후인 2012년(프랑스 대통령 임기는 미테랑 대통령까지는 7년에 연임 가능했으나 시라크 대통령 2기부터 5년에 연임 가능한 것으로 헌법 개정) 재선을 노리던 사르코지는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패배한다. 그는 1981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 31년 만에 연임에 실패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24대 프랑스 대통령이 된 올랑드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5년 전 사르코지에 패한 루아얄과 같이 공부했고 27년간 사실혼 관계에 있던 동거남이었다. 또한 루아얄과 사회당의 정치적 동지이자 당내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넷이나 태어났다. 두 사람은 2007년 사회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맞붙어 루아얄이 승리한 후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그즈음 사실 올랑드는 자신을 인터뷰했던 파리마치의 정치부 기자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와 열애 중이었다.

올랑드는 대통령 당선 축하연에서 두 명의 여인을 단상에 불렀다. 전 동거녀인 루아얄에겐 볼에 키스를 했고 새 동거녀 트리에르바일레에게는 입술에 키스를 했다. 동거녀가 퍼스트 레이디가 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이 프랑스 사회에서 처음으로 일었지만 트리에르바일레는 엘리제궁에 들어가 당당하게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프랑스 사회는 인정했다. 올랑드는 2014년 헤어진 루아얄을 내각 서열 3위인 환경에너지부장관에 임명했고 현재도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올랑드와 새 여인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동거를 시작한 지 7년 만인 2014년 1월 파파라치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프랑스 연예주간지에 등장한다. 올랑드 대통령이 심야에 엘리제궁을 나와 헬멧을 쓰고 스쿠터를 몰며 어디론가 가는 사진이다. 프랑스 국민이 사랑하는 여배우 줄리 가예와 대통령의 연애가 확인되었고, 퍼스트 레이디 트리에르바일레와의 동거 관계는 청산됐다. 올랑드보다 18세 연하인 줄리 가예(45)는 대선 당시 올랑드 후보 광고에 출연했었다. 2006년 국내 개봉한 ‘마이 베스트 프렌드’ 등에 출연한 지적인 배우다. 올랑드의 세 번째 동거녀가 된 그녀는 엘리제궁에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에마누엘 마크롱

임기를 두 달여 남긴 올랑드를 이을 대통령은 누가 될까. 39세의 정치 신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지지율 2위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당선이 되면 프랑스 사상 최초로 30대 대통령이 된다. 현재 지지율 1위는 ‘프랑스 퍼스트’를 내세우며 보호주의와 반이민 정책을 부르짖는 프랑스판 트럼프인 극우파 마리 르펜(여성)이다. 그러나 결선 투표에서는 마크롱이 르펜을 압도적으로 누를 것으로 조사됐다. 마크롱은 올랑드 대통령 아래에서 경제장관을 지내고 나와 온건중도 성향인 앙 마르슈당을 만들었다. 좌우를 초월해 프랑스통합을 외치는 그는 ‘제3의 길’을 내세운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 비유된다.

호사가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바로 그의 러브스토리다. 그가 당선되면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과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은 퍼스트 레이디가 엘리제궁의 주인이 된다. 마크롱의 아내 브리지트 트로뉴(64)는 스물 다섯 연상이다.

트로뉴는 마크롱이 프랑스 북부 아미앵시의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문학과 연극을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15세, 40세였다. 트로뉴는 남편과 세 아이가 있었고 그중 맏이는 마크롱과 동급생이었다. 두 사람은 연극 연습을 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마크롱의 부모는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마크롱을 파리의 명문고등학교로 전학시켰지만 그는 “꼭 다시 돌아와 선생님과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결국 트로뉴도 이혼을 하고 마크롱이 29세였던 10년 전에 결혼했다. 나이라기보다는 세대를 초월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대중잡지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식 사랑?

나이를 초월해 사랑하고, 사생아를 낳아 키우고, 재임 중에 혼외 여인을 두거나 이혼하거나 동거녀를 바꾸는 프랑스 대통령들의 대를 이은 러브스토리. 우리나 영미권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치인이나 유명인사의 사생활은 프랑스에서는 거의 정치적 사회적 논란이 되지 않는다. 정치적 도덕적 공격 대상도 아니다. 직무 수행과 사생활은 철저하게 별개로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언론이나 국민은 대통령의 연애나 밀회가 국가 이익에 관련되지 않고 국민 세금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연애할 권리가 있고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여배우의 집에서 밤을 보낸 뒤 손수 운전해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냈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천하에 알려진 바람둥이였다. 좀 과장하자면 심야에 엘리제궁을 탈출해 연인과 밀회를 즐기는 게 마치 프랑스 대통령들의 전통이 돼가는 분위기다.

이웃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정치인의 불륜이나 혼외정사가 드러나면 바로 사임의 이유가 되고 대통령의 꿈은 접어야 한다.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사르코지의 이혼과 결혼, 프랑스인의 반응을 보도하면서 “프랑스인들이 미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미친 건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적 제도적 토양이 있다. 동거나 사실혼은 이미 법적으로 가족 형태의 하나로 인정돼 사회보장 납세 양육비 같은 제도적 보호를 받고 있다. 정부가 1999년 동거가구의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연대협약’(팍스, PACS)을 도입한 이후 법률혼 대 시민연대협약 건수의 비율은 3 대 2 정도가 됐다. 팍스는 동거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면 법률혼과 달리 개인 호적에 커플 관계가 기록되지 않고, 독신으로서의 지위가 유지돼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복잡한 이혼 절차 없이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다. 동거 3년 후부터는 상속도 가능하다.

프랑스는 이 제도 도입 후 법률혼이 줄면서 혼외출산율이 60%로 늘어났다(한국은 2%).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도 가파르게 증가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2%가 넘었다. 우리나라는 통계청이 22일 발표한 ‘2016년 출생사망 통계’에 따르면 OECD 최하위인 1.17명이다(OECD 34개 국 평균은 1.68명). 우리 정부는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 10년 간 80조 원이 넘는 예산을 썼다. 프랑스에서 다양한 결혼의 형태와 남녀상열지사는 도덕의 울타리가 아닌 개인의 선택일 뿐이며, 그 선택은 존중받고 있다. 일찍이 계약결혼을 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후손답다.

미국의 저명한 불문학자 매릴린 옐롬이 쓴 ‘프랑스식 사랑의 역사’(2월 국내 출간)를 최근 읽었다. 프랑스 작가와 작품 속의 사랑을 분석한 책인데 그의 관점에 따르면 프랑스인은 언제나 사랑에 자유롭고 열중한다. 관습이나 평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 쏟는 열광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익숙하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모든 형태의 사랑을 자신이든 남의 경우든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나의 연애가 로맨스가 되기 위해서는 남의 부적절한 관계도 로맨스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왜 그들은 유별날까. 옐롬은 “프랑스인들이 진정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리에 거주하며 ‘그녀들의, 프랑스식, 연애’ 라는 책을 쓴 곽미성은 프랑스인에게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결혼이 아니라 둘만의 내밀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존감’이라고 관찰했다. 작가는 프랑스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인류’라고 규정했다.

글쓴이: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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